
아베 신조 정권하의 일본에서는 ‘권력의 사물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유지가 헐값에 수상의 지인에게 양도되었고, 사인(私人)이나 다름없는 수상 부인의 개인 일정에 공무원이 동원되었다.
권력의 사물화는 ‘가산제(家産制) 국가’로의 역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산제’란 문자 그대로 권력자의 사적 재물과 국가의 공공물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고, 권력자가 사적인 목적을 위해 국가의 재물을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체제이다.
가산제 국가에서는 또한 권력자와 관료 사이에 ‘신분적 예속관계’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가산제 국가에서 가신(家臣)은 법에 기초하여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모리모토 학원 국유지 헐값 매각에 있어서 아베 전 수상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공문서가 위조되고, 관료는 국회에서 거짓 답변을 하였다. 아베 전 수상이 증거 인멸을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수한 가신은 주군의 심정을 짐작하고 먼저 주군이 해줬으면 하는 것을 행한다. 이것이 현재 일본의 관료제이다.

아베 정권하에서 국회는 ‘부조리극의 무대’가 되었다. 2018년 5월 14일에 열린 중의원 예산 위원회.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공동대표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아베 수상은 ‘미일(美日)은 백 퍼센트 일체’라 강조하였으나, 북미정상회담에 있어서 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급의 미사일 폐기를 약속하면 미국은 본토에 대한 위협이 없어졌다
하여 만족하고, 교섭성립을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근거리 미사일이 남아 있으면 일본에 있어 위협은 지속된다. 이 점에 대해서 수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의 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마키 의원의 질의가 이어지던 중에 자민당 의원들이 야유를 퍼부었고, 그러던 중에 제한 시간이 종료되어 아베 전 수상의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의회정치의 파탄이다.
야유가 오가는 일본 국회의 모습은 마치 부조리극 한 편을 보는 듯하다. 부조리극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모리토모·가케학원 의혹에 대해서 악폐를 도려내겠다는 아베 전 수상의 발언, 성희롱은 죄가 아니라는 아소 다로 전 부총리의 발언. 모두 부조리극 속의 대사나 다름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일본 국민들이 부조리에 익숙해져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리토모·가케학원 의혹이 추궁된 직후인 2018년 5월에 실시한 몇몇 여론조사에서 내각지지율은 오히려 약간 상승하였다. 국민은 권력자의 부패에는 비판적이나, 그것이 정권에 대한 불신임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끝나는가? | 야마구치 지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일본정치의 변화를 분석한 책이다. 증오와 공포를 이용한 강권정치에 대해 우려하는 야마구치 지로는 민주주의를 끝내지 않기 위해 사고와 행동의 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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