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대학의 후루카와 기념 강당에는 오래된 두개골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대항해 봉기한 동학당 지도자의 효수된 유골이었다. 이노우에 가쓰오는 현장 조사와 기록을 통해 식민지 지배 시대에 유골이 채집된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1. ‘동학당’의 방치 유골, 홋카이도대학에서 발견
1995년 8월 초 홋카이도대학에서 완전히 백골이 된 머리뼈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골은 성인 남성으로서는 약간 작았다. 그러나 두개골의 크기와 키(신장)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어금니 세 개가 남아 있고 두개봉합부의 교합, 치아의 마모 정도로 볼 때 30~40대 남성인 듯이 보였다. 두개골 안에 모래알과 미세한 풀뿌리들이 붙어 있었다.
유골에는 한 장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동학당’이 전라남도 진도에서 평정되었다. 주도자 수백 명이 살해되고 사체가 길에 널렸다. 수괴자는 효수되었는데 이 유골은 그중 한 명의 것이고 진도를 시찰했을 때 ‘채집’했다는 얘기다.” ‘채집’이라는 말을 쓴 것에서 유골을 ‘물건’으로 보고 멸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모는 화학 염료의 또렷한 괘선 색깔과 인쇄의 바랜 정도까지 메이지기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글씨체도 에도의 형태를 간직한 특유의 것이었다. 메모는 1906년 당시에 쓰인 것이 분명했다.
유골을 가져온 메이지(明治) 39년은 서기 1906년이고, 동학당이 봉기한 메이지 27년은 채집 12년 전인 1894년, 청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유골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101년이 지난 후였다.
2. 본격적인 조사
1995년 8월 초순 ‘동학된 수괴’라 쓰여 있는 유골의 역사적인 전래를 조사하는 담당 위원이 된 이노우에 가쓰오는 우선 일본에서의 자료 조사에 착수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방위연구소 도서관이었다. 방위연구소 도서관 사료열람실에는 동학농민전쟁 관련 사료가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는 「동학당폭민」이다. 토벌 일본군이 히로시마 대본영에 보낸 전신 보고가 다수 있었다. 또 하나는 남부 병참감부의 「진중일지」로 토벌부대를 지휘한 병참사령부의 공식 일지다.
그중에서도 「동학당폭민」은 구체적이었다. 가령 부산수비대 후비 제10연대 제4중대장 스즈키 야스타미 대위가 전라도 순천에서 부산사령부에 보내고, 부산에서 다시 대본영으로 전송한 전투 보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효수와 포살(총살)이 열거되어 있다.
한병과 일본군이 광양부에 들어가고, 부민이 관리와 협력하여 농민군을 붙잡았다. 기타 78명을 합쳐 92명이 죽임을 당했다. 부민도 관리도 조선인이지만 촌락에 도피한 농민군에 대해서는 그 땅을 아는 지방 인민이 아니면 수색을 할 수 없었다. 인민을 동원하여 그들을 붙잡아 일본군이 총살과 효수를 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의 사료가 많았다.
방위연구소 도서관 조사를 통해 해골 메모의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이노우에 가쓰오는 한국 현장 조사에 나섰다.
이노우에 가쓰오가 서울에서 방문한 곳은 서울대 규장각이다. 서울대 규장각은 200년 이상의 역사가 있고 왕조시대에 관한 장서 30만 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노우에 가쓰오는 지방관 보고 등을 도별로 정리한 「각사등록」을 살펴보던 중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한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에서 일본인 토지 취득에 관해 도민이 소장을 냈다. 진도 앞바다의 섬, 조도면에서 일어난 도민의 저항운동이다. 이는 서력 1906년 10월 22일 일어난 일인데, 진도에서 동학 유골을 채집한 9월 2일보다 한 달 뒤의 일이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기록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예컨대 붙잡힌 동학농민의 성명을 써넣은 기록에서 ‘효’, ‘포살’, ‘장살’이라는 문자가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여기서 포살은 총살이고 장살은 곤장으로 살해하는 처형이다.
한편 함께 동행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목포의 농업기수 사토 마사지로의 조사를 맡았다. 목표는 1906년 9월 사토 마사지로가 진도에 출장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찾는 것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각사등록」의 ‘농상공부래거문’ 등에서 권업모범장 기사, 임시면화재배소 기사, 사토 마사지로라는 이름을 찾아냈지만, 진도에 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지는 못했다. 찾을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료 조사에 있어서 사료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들은 현장 조사와 기록을 통해 식민지 지배 시대에 유골이 채집된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쓰오의 책으로, 저자가 홋카이도대학에서 발견된 유골의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집필한 <중간 보고서>(1996)와 <보고서>(1997), 그리고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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