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 규모 2위에 올라선 일본은 그야말로 초호황기를 누렸다. 일본의 상류층들은 버블 경기 덕분에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현금을 주체하지지 못하고, 부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1. 일본의 전례 없는 초호황기
1980년대 중반 이후 발생했던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의 폭등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고도경제성장부터 짚어봐야 한다. 1955~73년까지 미국의 실질성장률이 3%, 유럽의 주요국들도 기껏해야 5~6%에 불과했을 때 일본은 평균 10% 전후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루면서 패전 이후 경제적 기적을 일구어 냈다.
당시 일본의 경제 성장을 이끈 것은 기술력이었다. 일본 기업들이 출시했던 신제품과 신기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해 나갔으며, 이들을 생산으로 연결시키는 설비투자가 전산업에 걸쳐 확대된 점이 고도의 경제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 규모 2위에 올라선 일본은 그야말로 초호황기를 누렸다. 버블 경기 덕분에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현금을 주체하지지 못하고, 부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여기저기 몰려다니던 일본 상류층들의 모습은 버블 경제 시대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높은 질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일본의 제품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일본산 섬유, 철강, 그리고 전자제품과 자동차, 반도체 등에 대해 쿼터제를 도입하고 덤핑 관세를 부과하는 등 다양한 무역제재로 대응했지만, 그럼에도 일본과의 무역적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역제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무역적자가 줄어들지 않자, 미국은 수출의 근간이 되는 환율 자체를 강제로 조절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미 재무장관 베이커(James Baker, 1930~)는 뉴욕 플라자 호텔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G5 재무장관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를 강제로 올리고 달러 가치는 내려 미국의 계속되는 무역적자를 해소하고자 했다. 1985년 9월 22일의 일이다.
이 플라자 합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고 대외 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 통화정책을 공조한다는 두 줄의 성명이 전부였지만, 이 두 줄의 성명이 일본에게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토네이도급 치욕을 안겨주었다. 또한 플라자 합의가 일본 부동산 버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잃어버린 20년
버블이란 내재가치에 비해 시장가격이 과대평가될 때 쓰이는 비이성적인 투기행위를 일컫는다. 일본인들은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토지 불패 신화를 고도경제성장기 몸소 체험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비자물가지수가 2배 오르는 동안 토지 가격이 50배 정도 급등하는 경험을 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땅값의 실질 가치가 25배 급등한 것이 된다. 오를 때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계속 오르려는 속성이 있어서 도쿄와 오사카 등 이른바 일본의 6대 도시의 지가는 3.7배까지 급등했다.
이렇게 지가가 상승하는 와중에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6%에서 2.5%까지 떨어뜨리자, 은행들은 대출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 더해 LTV가 120% 가능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토지만 있으면 이를 담보로 자금을 끌어들여 다른 저렴한 땅을 사고, 이렇게 사 놓은 땅의 지가가 오르면 또다시 토지를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아 또 다른 토지를 구매하는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엄청난 부를 형성한 부동산업자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쿄의 부자 동네인 미나토구(港区)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광풍은 요코하마(横浜),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埼玉), 치바(千葉) 등 관동평야 전체로 번져 나갔다.
한 번 불어온 광풍은 쉽게 멈추지 않았고, 오사카(大阪)에서 케이한신권(京阪神圈)으로, 그리고 나고야(名古屋)에서 토요타시(豊田)를 포함한 아이치현(愛知県) 광역권으로까지 번졌다. 일본 전역에 ‘1억 명 부동산업자’라는 말이 돌면서 패닉 바잉(Panic Buying)이 시작된 것이다. 최대한 물량을 확보하려는 시장심리의 불안 때문에 가격에 상관없이 발생하는 매점매석 현상이 발생한 것도 이때이다.
버블은 숫자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1987년 상업용 융자금액이 74조 3천억 엔이었는데 1991년 148조 6천억 엔으로 두 배 이상이, 그리고 주택용 융자금액도 75조에서 127조 엔으로 두 배가량 증가하였다. 이는 상업용과 주택용을 합하면 불과 4년 만에 융자금액이 126조 4천억 엔을 넘어섰다는 의미가 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땅값을 잡기 위해 일본정부는 1987년 8월에 우리나라의 투기규제지역과 유사한 토지거래 감시구역제도를 마련하고 두 달 뒤인 10월에는 토지 관련 대출 기준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땅값을 잡기 위한 일본정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부동산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었다.
일단 버블이 붕괴하면 장기침체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여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수준의 탈출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다.
1992년을 기점으로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기업은 위기 극복을 위해 신규 채용을 덜하거나 비정규직을 뽑는 비율을 크게 늘렸다. 그러면서 취업 빙하기가 찾아오고 내수시장도 동시에 침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부동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6대 도시 중 3대 권역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등만 지가가 오를 뿐 지방은 아직도 30년 전 버블 전성기의 50%에도 못 미치고 있다. 매물이 쏟아져도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 수도권 지역의 골프회원권 시세를 1990년 기준으로 100이라고 할 때 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고점대비 30%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정도이다. 3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잃어버린’이란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버블 붕괴는 어쩌다 시작되었나
한국의 부동산은 일본의 부동산 폭등과 유사한 점이 있다. 우리가 일본 부동산과 유사한 점은 은행 빚으로 쌓아 올린 부동산 자산이 언젠가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
www.aladin.co.kr
'책으로 나누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0) | 2023.02.23 |
---|---|
일본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한 이타이이타이병 (0) | 2023.01.25 |
새로운 주거 대안의 제안 (0) | 2023.01.12 |
자율주행자동차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0) | 2023.01.09 |
변덕쟁이 일본 정부의 대실수 (0) | 2022.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