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발생 직후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은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였다.
1. 관동대지진 발생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가미 만을 진원지로 매그니튜드 7.9, 중앙기상대 지진계 침이 심하게 흔들려 계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건물도 붕괴했지만 특히 지진 이후의 화재로 인한 피해가 컸다. 당시 내무성 사회국의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9만 1,344명 중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7만 5,953명으로 전체의 83%를 차지했다. 화재를 피해 강으로 도망치다 익사한 자도 많았다.
화재는 지진 직후부터 발생하여 9월 3일까지 계속되었고, 도쿄 시가지의 44%가 소실되었다. 도쿄 니혼바시 구 내의 건물 가옥은 전소했고, 간다 구, 아사쿠사 구, 혼조 구의 가옥도 거의 불탔다. 대부분이 목조 가옥였던 데다, 인구밀도가 높은데도 피난할 수 있는 공토가 별로 없었고, 도시계획도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불러일으켰다.
심각했던 관동대지진의 체험은 여러 기록으로 남겨졌다. 『개조』, 『태양』, 『실업지일』등의 잡지들은 앞다퉈 특집호를 편성했고, 『아사히그래프』, 『대진재사진화보』등은 시각적인 기록을 남겼다. 특히 1923년 10월 대일본웅변회 고단샤가 간행한 『다이쇼 대진재 대화재』는 피해 상황과 양상 이외에 이재민의 체험기와 피난기를 게재하며 주목받았다. 여기에 더해 지진에 따른 미담과 애화도 게재했다.
이처럼 이재민의 체험이 도쿄 사람들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널리 국민의 경험으로서 공유되어 관동대지진은 시대 인식으로서 의식되었다.
2. 조선인 학살 사건
진재 직후에는 정보 부족으로 인해 ‘대해일이 온다’, ‘대지진이 다시 일어난다’ 등의 여러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은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였다.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9월 1일부터였다. ‘사회주의자와 선인이 많이 방화한다’, ‘불량선인이 습격한다’, ‘우물을 마시고 과자를 먹는 것은 위험하다’ 등의 근거 없는 말들이 나돌았다.
당시 경시총감이었던 아카이케 아쓰시는 특히 치안유지에 과민했다. 진재가 발생함과 동시에 군대가 출동하여 9월 3일부터 11월 15일까지 히비야 방화사건 이래 계엄령이 내려졌다. 군대와 경찰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검속하는 모습은, 일반인에게 유언비어가 진실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도쿄의 주민들은 지역마다 자경단을 결성했다. 친족과 지인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왕복하는 사람들을 힐문하여 조선인임이 밝혀지면 갖고 있던 죽창이나 쇠갈고리로 학살했다. 이후에 요시노 사쿠조와 김승학이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학살된 조선인은 6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또한 군대에 의해 조선인 학살이 자행된 것이 사료적으로 밝혀졌다.
한편 조선인 학살에 직접 관여한 자가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차별하면서도 식민지 사람들에게 공포의 심성을 품은 제국 사람들의 존재 양태를 보여준다. 진재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은 그때까지 일본 정부를 향해 도시민중소요를 일으켜 온 잡업층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은 일용노동자와 심부름꾼으로서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잡업층의 불안이 진재 사태 속에서 분출된 것이다. 학살이 일어난 곳은 조선인과 일자리를 경합한 지역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채로운 언론과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정당내각의 성립으로도 결실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 히비야 방화사건에서부터 다이쇼정변, 쌀소동, 보통선거의 실시, 그리고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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