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발을 진행하던 북한이 1993년 3월 돌연 NPT협정 탈퇴를 표명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냉전 후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북한은 미일 관계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 동맹표류
냉전 종결 후, 일본의 정치도 크게 변동했다. 사가와큐빈(佐川急便)사건으로 신뢰를 잃은 자민당이 총선거에서 대패하며 자민당의 55년 체제가 막을 내렸고, 호소카와 모리테루가 이끄는 비자민연립정권이 발족했다.
정치 개혁을 최대 과제로서 발족한 호소카와 정권은 대외 관계에서 ‘동아시아 위기’에 직면했다. 핵개발을 진행하던 북한이 1993년 3월 NPT협정 탈퇴를 표명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 것이다. 냉전 후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북한은 미일 관계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994년 2월 열린 회담에서 윌리엄 J. 클린턴 대통령과 호소카와는 경제 문제 이상으로 북한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정상회담 후 호소카와가 이시하라 노부오 관방부장관에게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가능한 일을 검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같은 해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나 방위사무차관 아키야마 마사히로에 따르면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미군의 후방지원마저 하지 않으면, 이제 일미안보동맹 관계 자체가 유지불가능하게 된다는 인식을 일본과 미국 쌍방이 가질 정도로 한반도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다.
상황이 이러자 호소카와는 새로운 안전보장 정책을 모색했다. 새로운 안전보장책에는 ① 안보체제가 기본, ② 일본은 군사대국이어서는 안 되며, 경무장이어야 하고, ③ 설령 유엔이 요청했을 경우에도 해외에서 국가의 무력행사에 응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새로운 안전보장 정책을 모색하던 호소카와는, 그러나, 연립정권의 내부 갈등과 자신의 금전 문제로 인하여 퇴진했다.
2. 97가이드라인과 주변사태법
위기가 계속되자 미일은 가이드라인 개정에 나서 1997년 9월 새로운 가이드라인(97가이드라인)을 합의했다. 미일은 새로운 가이드라인에서 ① 평소의 협력, ② 일본 유사, ③ 주변 사태로 구분하여 미일의 역할이나 조정 자세를 규정하였다.
97가이드라인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주변사태안전확보법(주변사태법)’이다. 하시모토 내각은 97가이드라인에 실효성을 갖게 하기 위해 주변사태안전확보법을 중심으로 하는 가이드라인 관련법을 정비하려 했지만 난관에 부딪혔다. 하시모토 내각이 사회민주당의 동의없이 주변사태법안을 각의결정한 것에 불만을 품은 사민당은 1998년 5월 연립이탈을 결의했다. 그리고 경제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실시한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하시모토는 퇴진했다.
하시모토의 퇴진 이후에도 주변사태법은 오래 기간 표류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999년 5월 주변 사태에 있어서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주변사태법, 일본인 구출을 위한 자위대 사용을 인정하는 자위대법의 개정, 개정된 미일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이 성립하였다.
97가이드라인, 주변사태법 성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 국민의 대일 감정은 호전되었다. 하지만 동맹 표류에 마침표가 찍혔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안보체제를 거세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미일안보체제사
두 나라간 안보-외교뿐만이 아닌 두 국가가 2018년까지 세계의 역사와 함께 정치적·경제적인 문제에 따라 어떻게 조약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 연도별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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