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의 하나인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로 예부터 세시명절로 여겨왔다. 동짓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팥죽이다. 우리 민족은 왜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되었을까?
1. 건강과 행운을 맞이하는 의례, ‘팥죽 뿌리기’
팥죽 뿌리기는 동지에 가장 널리 행해지는 의례로, 출현 지역 산출이 불필요할 정도로 동지를 기념하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행해진다.
팥죽 뿌리기가 가장 광범위하게 출현하는 지역은 경기도이다. 이천 설성에서는 잡귀가 들어오지 말라고 팥죽 국물을 집안 곳곳에 뿌렸고, 수원 팔달에서는 액막이를 위해 팥죽을 뿌렸으며, 안성 도기에서는 축귀를 목적으로 팥죽을 뿌렸다.
경남 또한 팥죽을 뿌려 제액과 축귀를 하는 의식이 폭넓게 나타나는 지역이다. 거제 일운에서는 모든 병을 막고자 팥죽을 뿌리고, 밀양 초동에서는 사악한 기운을 쫓고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고자 팥죽을 뿌리며, 김해 생림에서는 병마와 잡귀를 쫓기 위해 팥죽을 뿌린다. 그런가 하면 고성 대가에서는 된장이 맛있으라고 장독대에 팥죽을 올려 동지 할머니를 대접하기도 한다.
육지와 단절된 섬 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가진 제주도에서도 동지가 되면 팥죽을 뿌린다. 서귀포 중문 하원리와 남제주 표선에서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대문과 집안 곳곳에 팥죽을 찍어 바르고, 제주 노형과 제주 이호에서는 팥죽을 뿌려 액막이를 하면 다음 해에 운수가 좋다고 여긴다.
한편 충남 지역의 동지팥죽은 제액축귀의 기능과 함께 건강과도 관련된다. 가령 보령 웅천에서는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놓는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동지시에 맞추어 뿌리면 안택고사보다 좋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각 지역의 팥죽 뿌리기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지에 행해지는 팥죽 뿌리기 의례는 공통적으로 액을 막고, 건강을 기원하기 위한 의례를 하고 있다. 즉, 동지의 팥죽 뿌리기는 궁극적으로 건강과 행운을 맞이하는 의례라 할 수 있다.
2. 동지팥죽과 설날의 떡국
동지팥죽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설날의 떡국과 닮았다는 것이다. 설날 떡국과 동지팥죽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새해와 동지의 유사성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동지와 새해의 유사성은 동지를 기념하는 시기인 양력 12월 22일 무렵이 절기상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는 데서 뒷받침된다. 이는 실제 태양의 운행에 의한 자연력의 새해 첫날은 동지 다음날이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연력을 역법에 채택한 나라는 중국의 주나라로 주나라는 동지가 있는 음력 11월, 자월(子月)을 새해 첫 달로 삼았다. 주나라는 ‘기자조선’과 관련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한민족의 고대 문화와 연관된 부분이 적지 않다. 따라서 문헌 기록을 통해 살필 수는 없지만 ‘고조선’은 아마도 동짓달을 세수로 하는 역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동짓달 세수 기념은 이후 기원전 104년 중국 한나라 무제 시기에 이르러 음력 1월을 새해 첫 달로 하는 ‘태초력’이 제정되면서 변경됐고, 이후 세수에 관한 역법의 변경이 있었지만 이후 새해는 대부분 1월로 고정됐다.
한국 역시 국가와 시대에 따라 역법의 변경이 있었다. 한 예로 695년에는 동지가 있는 음력 11월이 새해 첫 달이었으며, 700년부터 인월(1월)이 새해 첫 달로 쓰였다. 이를 고려하면 설날을 비롯한 고대 한민족의 명절 날짜가 부여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짓달 세수의 풍속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이의 유습이 현재까지 이어져 ‘작은설’ 인식과 ‘동지 팥죽의 한 살 더 풍속’이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동지 팥죽과 설날 떡국, 이 두 절식 사이에 공통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지 팥죽은 설날의 떡국과 달리 무속 신앙적 성격이 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지는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날로 고대인들은 이날 음의 기운이 가장 강하다고 여겼다. 또한 밤이 가장 길어 음의 기운이 강한 이날 악한 잡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의식이 필요했다.
어둠인 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태양이다. 하지만 태양은 동짓날에 이르러 가장 짧다. 따라서 태양 대신 태양의 역할을 하며 힘을 보태 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이것이 붉은색의 태양 빛 국물에 태양을 형상화한 새알심을 넣은 동지 팥죽이었다.
반면 설은 역법에 의한 새해 첫날로 양기가 충분한 태양처럼 건강하고 밝은 한해를 보내라는 의미의 날이다. 따라서 벽사를 위한 붉은색 대신 희망과 밝음의 흰색이 절식의 색채로 활용된다. 흰색은 신앙적으로 신성을 의미하며, 특히 태양숭배가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지역에서는 태양의 광명을 표상하는 절대 신성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유로 설날의 절식인 떡국은 팥죽과 달리 맑은 국물을 사용한다. 이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설날 떡국의 맛을 내기 위해 닭이나, 굴, 소고기 등으로 떡국새미를 넣지만 일부 지역에서 국물의 탁함을 막기 위해 소금 간만을 해 떡을 끓이는데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부여 은산에서는 설날 마른 떡국이라 하여 맹물에 간을 하고 달걀로 지단만 부쳐 올렸다. 천안 수신에서는 닭을 삶아 그 국물로 끓이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소금 간만을 해서 끓이기도 했다.
이처럼 동지팥죽은 크게 제액과 벽사의 주술적 기능과 함께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새해맞이 절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동지는 다른 명절과 달리 일정한 의례 없이 절식만으로도 명절이 기념되고 그 전통이 현재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명절의 절식과 의례
절식으로써 한국 명절을 이해하고 발전 계승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저술된 책이다. 명절은 그 문화 구성원 대다수가 기념하는 풍속이며, 절식은 그 명절에 맞춰 만들어 먹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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