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쟁범죄를 심판하게 되었을까?
무엇을 ‘전쟁범죄’로 규정할 것인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며, 이는 ‘전쟁범죄를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요 전범을 다룬 뉘른베르크재판 방식은 1945년 8월에야 결정되었고, 도쿄재판의 방식은 더욱 나중에 결정되었다. BC급 전범재판 역시 주요 전범의 취급과 관계되어 있다 보니 각국은 구체적인 진행 방식 등을 다소 늦게 결정하게 되었다.
1. 전쟁 피해국의 요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규모로 잔악 행위를 저질렀다.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잔악 행위는 지금까지의 전시국제법이 상정한 개개의 잔악 행위라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에 전쟁 중부터 전시국제법의 재검토를 제기하는 의견이 나왔다.
전쟁범죄에 대한 최초의 움직임으로서 ‘세인트 제임스 궁전 선언(Declaration of St James's Palace)’이 주목을 받는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9개국은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모여 독일이 시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폭력을 비난하고 재판을 통해 이러한 범죄를 명령한 자나 실행자를 “처벌함을 주요 전쟁 목적에 넣기로” 결의했다. 즉 세인트 제임스 궁전 선언은 연합국 사이에서 잔악 행위의 책임자를 재판을 통해 처벌하기로 선언한 첫 공식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참관인으로 출석한 중국 대표도 이 선언에 동의하고 일본에도 마찬가지로 원칙을 적용할 의사를 표명했다.
선언에 동의한 국가들은 미국, 영국에 실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전범 처벌에 나서기를 주저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대상으로 한 전범재판이 잘 진행되지 않았고, 나아가 독일이 포로로 잡은 폭격기 탑승원들을 전범으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하여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언에 동의한 나라들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1943년 10월 런던에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인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폴란드 남아프리카, 영국, 미국,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등 17개국이 참여한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에서 전범 처벌을 둘러싼 중요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때마침 같은 해 11월 1일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이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독일이 저지르는 잔악 행위의 책임자는 범죄를 저지른 나라에서 재판한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또 “범죄가 특정한 지리적 제한을 갖지 않는다.”라며 주요 전쟁범죄인의 취급을 장래 연합국의 결정에 맡겼다.
잔악 행위 책임자를 재판에서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추축국, 특히 독일이 조국을 유린한 중, 소국에서 나왔다.
2. 그렇다면 전쟁범죄를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시점에서 전쟁범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전쟁법규관례위반’이다. 법적 근거는 비인도적 병기의 사용 금지와 포로·부상자 보호 따위를 약속한 1899년과 1907년의 ‘지상전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과 부속서인 ‘지상전 법규관례에 관한 규칙(통칭 ’헤이그 지상전법규’)’, 포로를 인도적으로 다루도록 규정한 1929년의 제네바조약 등이다. 이러한 전시국제법에 따라 국제법규를 위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한 적국민을 재판할 권리를 상대국에 인정한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전시중죄(戰時重罪) 혹은 전시범죄라 불리며 전시 중에만 재판하여 처벌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상호 견제하여 전시국제법위반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전쟁범죄인을 승전국에 인도하여 군사재판소에서 처벌하는 방식을 인정하였다. 이는 극단적인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전시범죄에서 국제법상의 범죄인 전쟁범죄로 성격이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이때 일본도 승전국으로서 그 점을 승인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두 번째는 침략 전쟁을 위법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전쟁을 시작하는 행위를 전쟁범죄로 인식하
는 사고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전후 연합국이 독일을 상대로 용의자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독일이 스스로 재판하겠다고 주장하여 결국 강행하는 형태로 독일 스스로 라이프치히최고재판소에서 재판하게 되었다.
하지만 9건의 범죄와 12명의 용의자를 기소했을 뿐인 데다가 그중 6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죄를 선고받은 자도 금고 2년 혹은 4년 정도의 가벼운 형만 언도받았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미국 등이 전범재판의 취급에 신중했던 요인이었다.
그런데 1943년 10월 탄생한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는 연합국에 소속된 각국에서 국제법학자와 외교관 등이 참가하여 추축국의 전쟁범죄를 어떻게 다룰지 논의했다. 이 전쟁에서 매우 조직적이자 대규모 잔악 행위가 발생하여 현장에서 일어난 여러 잔악 행위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종래의 전쟁 범죄관으로 대처할 수 없는 점을 인식했다.
또한 그러한 대규모이자 조직적인 잔악 행위를 저지르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행한 국가와 군 등의 지도자를 재판하지 않으면 잔악 행위의 현장 관계자만을 재판해봤자 소용없다는 인식도 탄생했다. 훗날 ‘인도에 대한 죄’와 ‘평화에 대한 죄’로 정식화된 개념이 이때 처음으로 논의에 올랐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를 재판하기 위해서 1944년 10월 각국별 재판소뿐 아니라, 국제조약에 근거하여 설치된 국제법정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작성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러한 법정만으로는 모든 사건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각 방면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군사법정을 설치하여 심판한다는 제안도 동시에 나왔다. 즉 피해국이 단독으로 전쟁범죄를 재판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국제적인 법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협력하여 전쟁범죄를 심판하도록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추축국이 저지른 침략과 잔악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중소국의 의견을 반영했다. 런던에 있던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는 이러한 안건들을 영국 정부에 제안하여 실현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러한 국제법정이 대영제국 내부의 문제에 타국이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가능성을 경계하여 제국 영토 내에서 제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직접 재판하려고 했기 때문에 위원회의 제안을 묻기로 결의했다.
또한 독일의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도 소극적이었으며 처칠 수상은 그들을 체포여 즉결처분하기를 바랐다. 한편 또 다른 대국인 미국은 이 시점에서 정부의 통일된 방침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원회의 제안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그들의 생각은 훗날 재판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BC급 전범재판
저자 하야시 히로후미는 “일본계 일본인 남성”, 즉 ‘전쟁범죄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조심스럽고 냉철하게 사실을 짚어 이 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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